가둔지네
한강 본문
종이 피아노
한 강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어렸을 때 내가 살던 집에서 유일하게 풍족했던 것은 책이었다. 집안 곳곳에 마치 물이 넘친 듯 쌓이고 꽂히고 널려 있던 책들 속에서 목적 없이 아무거나 골라 읽으며 긴 오후들을 보내곤 했다.
형편이 어려웠으므로 우리 형제는 비교적 철이 일찍 들었던 것 같다. 반찬 투정을 한다거나, 군것질을 하기 위해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쓴다거나, 무슨 상표의 운동화를 신고 싶다며 조르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흔히 성장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문제들로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 지금도 나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안 쓰는 편이고, 대체로 눈에 안 보이는 것들에 끌려 보통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깜빡깜빡 놓치곤 하는데(그러다 가끔 치명적인 결과를 부르기도 하고), 아마도 그런 성향 덕분에 그 나이쯤 예민하기 쉬운 옷차림이나 도시락 반찬 따위에 상처받지 않는 시간을 보냈던 게 아닌가 싶다. 시시로 나를 딴 세상으로 보내주던, 지천으로 널린 책들도 중요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꼭 한 번 부모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해본 적이 있었다. 바로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노래를 좋아했다. 평소엔 목소리가 작은 편이었는데 노래할 땐 커졌다. 음악시간을 좋아했고 리코더 불기를 좋아했다. 계이름을 욀 필요 없이, 들은 대로 불어지고 계이름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은 한 해 한 해 눈덩이 불어나듯 커져서, 서울로 막 이사온 5학년 때는 더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함께 하교하던 친구가 피아노학원에 다녔는데, 그 아이가 그토록 지겨워하며 어떻게든 레슨을 빠지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몇 차례 그 아이의 피아노학원에 따라가 조그만 방의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그때의 기분은...... 어지러웠다. 친구가 건반을 두드리는 서툰 소리 위로 도처의 방들에서 울려오던 그 선명한 음들.
마침내 피아노학원에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며칠 동안 어머니 뒤를 따라다녔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계시면 그 옆에 쪼그려앉아 있고, 빈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시면 그림자처럼 뒤따라가 부엌에 서 있었다. 여름방학이었는데, 아직도 그 마당의 침묵, 어머니가 굳은 얼굴로 빨래를 털어 널던 모습, 자꾸만 내 종아리로 기어오르던 커다란 개미들이 생각난다. 별다른 고집 없이 자라던 둘째가 한 번도 안 하던 시위를 하니 부모님은 조금 당황하셨던 것 같다. 곤혹스러운 며칠이 지난 뒤, 마침내 어머니는 꽥 소리를 지르셨다.
안 된다니까! 우리 형편에.
그날부터 시위를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혔다. 가슴이 까맣게 탄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알았다. 밥도 맛이 없고 모든 게 시들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피아노를 못 가르쳐주신 걸 보면 그때 부모님의 형편이 어렵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얼마 뒤 나는 문방구에 가서 십원을 주고 종이 건반을 샀다. 책상에 네 귀퉁이를 압정으로 붙여놓고, 학교에서 간단히 배운 대로 노래를 연주했다.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고개를 까닥거리며 신나게 쳤다. 시위를 하거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그저 아이다운 낙천성이었을 뿐인데,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내가 종이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던 때가 그 시절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중학교 2학년 가을쯤부터 집안 형편이 조금 풀렸던 모양이다. 마루에 소파가 들어왔고, 아저씨 몇이 와서 낡은 싱크대를 떼어내고는 흰 나무문이 달린 깨끗한 싱크대를 설치하고 갔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봄방학이 시작됐을 때 부모님이 안방으로 나를 불렀다. 엉거주춤 앉는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피아노를 배우라고.
삼사 년 전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어지럽게 피아노에 매혹됐던 시기는 홀연히 지나가버렸고, 혼자서 끄적이던 일기나 시에 몰두해 있던 때였다. 사실, 연합고사를 앞둔 중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시작하는 아이는 없었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피아노학원도 졸업이었고, 계속한다면 그쪽으로 진로를 생각하는 아이들뿐이었다.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별로 배우고 싶지 않다고. 시간도 없을 것 같다고.
그때 어머니가 우셨다. 내가 뙤약볕 속에 쪼그려앉아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때는 그토록 냉정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배우기 싫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일 년만 다녀줘라. 안 그러면 한이 돼서.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내 책상에 일 년도 넘게 붙어 있었던 종이 건반에 대해서. 그걸 볼 때마다 까맣게 타들어갔던 마음에 대해서.
나는 그만 멋쩍어져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 숙연한 방을 어서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어 말씀하셨다.
배워보고 재미있으면, 대학 들어가면 피아노도 사주마.
아휴, 우리집에 피아노 놓을 데가 어디 있다구요.
점입가경이라니......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마음이 되어, 실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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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라는 작가 이름을 처음 접한건...
박혜원이라는 가수 덕분이었다. 박혜원은 슈퍼스타k를 통해 데뷔한 친군데..
그 친구 활동명이 흰(hynn)이다.
흰이라는 이름은 한강 작가의 '흰'이라는 책에서 따 왔다고 했는데...
'내가 더럽혀지더라도 너에게는 흰 것만을 줄께'라는 구절을 보고
본인도 노랠 부를때 순수함을 전할 수 있는 가수가 되자'는 뜻에서 지었단다..
한동안 팬심에서 가수 박혜원을 좋아라 했고, 그 덕에 어렴풋하게 한강이라는 작가가
있구나 했는데... 이번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 대단한 분이었구나 싶었다.
위의 '종이 피아노'.......에서도 문학적 대단함은 잘 모르겠지만, 동시대, 비슷한 나이대에서 겪었던 동질감으로 인해
가슴이 먹먹해졌다.
종이 건반을 두드리는 아이.... 그리고 시간이 흐른후 '피아노 학원 일 년만 다녀달라'는 부모....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갔던 어린 시절의 열정....
시간이 흘러도 타들어가는 마음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던 부모...
다섯 남매를 홀로이 키우시던 어머니... 그리고 크레파스 사달라고 떼쓰던 내가
오버랩되어 울컥했다.
한동안 한강님 작품을 눈속에 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