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둔지네
강릉항일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 약사 본문
청일전쟁 이후 일제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박한 상황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은 1895년 국모 시해로 인한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을사의병, 1907년 고종 강제퇴위에 따른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1918년 음력 11월 무오 독립선언을 연계로 국내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 발표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되어,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독립투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강릉의 을미의병활동은 1896년 의병장 민용호가 관동9군도창의소를 설치하여 원산의 일본군사령부 공격을 목표로 항전하였으며, 권인규, 권익현, 황청일 등 많은 선열이 가담하였습니다.
정미의병활동은, 을미의병의 주축이었던 권인규의 아들 권종해가 의병장 민긍호와 함께 일본군 강릉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신리면의 김해석, 정광칠, 연곡면의 신인로 등이 함께 하였습니다.
1909년 이후 강릉의병활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만주, 사할린, 미국 등 해외로 망명하거나 지하에서 비밀결사 투쟁으로 전환 되었습니다.
1919년 강릉의 3.1독립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최돈옥이 귀향하면서 은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4월초에 시작되어 외곽 면소재지까지 확산되어 5월까지 두 달여 지속되었습니다.
강릉의 3.1독립만세운동은 강릉보통학교 이명의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조직, 강릉 감리교회 안경록 목사 중심의 신도조직, 강릉의 유도진흥동지회원과 강릉청년회원인 최선재, 조대현, 최선근, 최돈옥, 김진숙, 최돈제, 최선호, 정식화 등의 청년조직, 최이집, 최진규, 박장실, 최영방, 김봉공, 류옥일 등이 구성원이었던 초당 창동회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과 하평보 공사가 있는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여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 내기 위해 선창부와 해산방지부 등 결사대도 함께 조직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4월1일, 2일, 3일, 4일, 5일, 7일, 8일 계속해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강릉에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경찰과 수비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참가자들이 다치고 체포 연행되는 가운데 괭이, 삽,가래 등을 든 농민들의 시위와 함께, 7일의 시위 군중은 화부산, 남산, 월대산 등지의 횃불시위, 안목, 강문의 선상횃불시위가 계속해 이어졌습니다.
3.1독립만세운동은 5월까지 강릉 전역에서 만 여명이 참가하였으며, 총칼을 앞세운 일본경찰과 수비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부상이 80여명, 검거는 무려 14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모진 고문과 함께 함흥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징역형과 태형을 의연하게 감내하였습니다.
최선재, 조대현, 이명의, 최선근, 최돈옥, 김진숙, 최이집, 최진규, 박장실, 최영방,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님의 애국충정을 다시한번 가슴에 새깁니다.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빛나는 평화적인 민족해방 운동이자 암울했던 시대, 독립의 열망과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횃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