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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헌사

모노세로스 2024. 10. 2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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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철에 산에 들면 떠올리는시구가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한 알' 이라는시입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가 빨갛게 영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냈는지,

우리네 인생사에 빗대어 절묘하게 읊은 명문입니다.

이즈음 만산을 물들이는 단풍이 꼭 그와 같습니다.

집근처의 대추는 그나마 사람이 가까이에서 돌보기라도 하지만,

가을산의 단풍은 저홀로 풍찬노숙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으니,

더 값지고 장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풍은 상선약수( 上善若水)의 철학과도 닮은 꼴 입니다.

노자 철학에 따르면 무위( 無爲)의 도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물(水)이라고 하죠.

만물을 이롭게 하는 자양분이면서도 이익을 다투는 일없이

오직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이 물이라는 이치입니다. 단풍 또한 다르지 않죠.

만인에게 큰 즐거움을 선물하면서도 오직 세상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는 단풍이야말로

선(善)의 최고봉이라 할 만 합니다.

지위의 고하,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아무 대가없이 황홀한 추색(秋色)을 누릴 권리를 선물하고, 

결국은 거름이 되는 홍엽귀근( 紅葉歸根)의 이치 또한 각박한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가 각별합니다.

 

만산홍엽, 단풍의 장엄한 이동이 한창입니다.

급한 것 같지만, 사실 단풍의 행진은 느릿느릿, 여유롭습니다.

산행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해발 고저(高低) 이동을 할때는시속 2m,하루평균 40∼50m를 내려오고,

북에서 남으로 위도상 이동을 할 때는 시속 600∼700여m, 하루 15km 정도를 옮겨 갑니다.

그렇게 우보(牛步) 걸음을 하면서 설악산 대청봉 (1708m)에 단풍이든지 한달 정도가 지나면

도시생활권에 다다르고,남도의 땅끝을 불타게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단풍을 변절의 상징 이라고도 합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에 빗대는 것이죠.

그러나 내로남불 변명과 야합이 판치는 세태에 빗대어 보자면,

이익을 바라는 일없이 모든이에게 차별없이 큰 즐거움을 선물하는 단풍의 변절이야 말로

오히려 교훈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산으로 들어 상선(上善)의 잔치를 즐기십시오.

따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2024. 10. 22. 강원도민일보 사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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